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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_묵상] 사사기 9장 1~15절_참 된 직분자는 말씀으로 나를 깨뜨리는 자

건신담 2026. 5. 17. 20:10

직분자 선거를 앞두고 하는 두 번째 설교이다.
지난 주일 설교를 잠시 복습해보자.
사도행전 6장 “집사의 기원”을 이야기 하고 있다.
비록 일곱 명의 사람이 집사인가 아닌가에 대한 논란이 있기는 합니다만, 스데반과 빌립은 사도들 처럼 복음을 전했다. 구제 사역을 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사도행정 6장에서 집사의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곧 집사란 구제의 식탁에서 물질을 다루어서 구원의 기쁨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섬기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목사가 말씀의 식탁에서 성경을 다루기 때문에 성령과 지혜가 충만해야 하듯이 집사와 권사도 구제의 식탁에서 물질을 다루기 때문에 성령과 지혜가 충만해야 한다.
그런데 집사를 어떻게 뽑았나? 사도들이 말하기를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신중하게 살펴보고 일곱 사람들을 택했으며 사도들이 안수하여 집사를 세웠다.
그런데 제비뽑기를 하지않고 왜 투표를 하였나?
시간이 지나면서 민주주의 원리가 정착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순절 성령 강림이후 교회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지명“ 대신에 ”성령님의 지혜와 인도“를 따라야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이후 장로를 뽑을 때에도 투표를 했다. 따라서 교회는 막중한 책임을 동시에 지고 있다고 했다.
왜냐하면 구약 시대처럼 제비 뽑기를 통해 세운다면 그저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받기만 하면 됐지만 투표를 통해 우리의 선택이 개입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왜곡시킬 위험도 덩달아 커졌다. 그래서 우리의 선택으로 하나님의 뜻을 왜곡 시킨다면 어떤 결과를 낳을까? 사사기 9장 말씀을 가지고 ”포도 나무와 가시 나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기로 한다.
먼저 본문의 배경을 먼저 이야기해보자.
사사기 9장은 기드온 사사가 죽은 후에 일어난 사건이다. 기드온 사사 이야기는 교회 학교를 나온 사람이라면 다들 한 번쯤 들어보셨을 텐데 한 손에는 횃불을 다른 한 손에는 나팔을 든 기드온의 300 용사들이 13만 5천 명의 미디안 군대를 물리쳤다. 그래서 기드온은 이스라엘에게 40년의 평화를 가져다 주었다.
그래서 일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드온에게 찾아와 “당신이 우리에게 왕이 되어 달라” 요청했다. 기드온이 왕이 되어 다스리면 이스라엘은 주변 나라들이 넘보지 못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우 위험한 요청이었다.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 “ 거룩한 백성”이었기 때문이다. 곤 주변 나라와 달리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다스리시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른 나라와 달리 사사가 평소에는 재판관의 역할을 하다가 전쟁이 났을 때에는 백성들과 함께 싸워야 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참왕이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고 사사는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재판하다가 전쟁이 터지면 백성들과 함께 싸워야 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이스라엘의 통치체제였다.
그런데 기드온에게 왕이 되어 달라 했으니 기드온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청이 가지고 있는 위험을 알았다. 그래서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않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않을 것이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는 정답을 내놓았다. 그런데 기드온이 앞뒤가 다른 행동을 하는게 아닌가? 그러니까 백성들에게 한 말과 다른 행동을 하는게 아닌가?

첫째, 오늘 본문에 등장하듯이 자신의 아들에게 아비멜렉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이 이름은 “나의 어버지는 왕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 그 왕은 누구라는 뜻일까? 기드온이 었다. 왜냐하면 아비멜렉의 아버지는 기드온이니깐 말이다.

둘째, 기드온은 에봇을 만들어 자기 고향 에브라에 모셨다.그런데 에복은 대제사장이 겉옷에 걸치는 것으로 하나님의 뜻을 묻는데 사용했다. 그런데 사사인 기드온이 에봇을 사적으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자기 고향에 두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사람들은 마치 점집 찾아가드스이 기드온이 사는 고향으로 찾아왔다. 그 결과 이스라엘과 기드온의 집에 올무가 되고 말았다. 그러니까 마치 독버섯처럼 미신이 이스라엘과 기드온의 집에 자라고 말았다.

기드온의 마음에 숨겨진 욕망은 결국 아들 아비멜렉에게서 드러나고 말았고 이스라엘과 기드온의 집에 자란 독버섯은 세겜 사람들과 기드온의 집을 파멸로 이끌고 말았다. 왜냐하면 기드온은 하나님이 두려워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아버지 기드온의 마음에서 왕이 되고자 했던 마음을 보았던 아들 아비멜렉은 사람들을 이끌고 왕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겜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도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아비멜렉을 왕으로 뽑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악한 사람끼리 뭉친 결과 서로를 죽이고 말았다. 비록 처음에는 뜻이 하나가 되었지만 목표를 이룬 후에는 모든 것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를 장애물로 여겼기 때문이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많이 본다. 한탕하려고 모였지만 결국 모든 것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를 죽이고 죽이는 모습말이다.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의 끝이 그러했다.

그럼 구체적으로 아비멜렉은 어떤 사람이었나?

첫째, 세겜출신이었다. 그래서 아버지 기드온이 죽자 세겜으로 달려가 어머니의 형제들 곧, 삼촌들과 일가 친척들을 불렀다. 왜냐하면 다른 형제들이 왕이 되기 전에 먼저 손을 써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향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왕이 되려고 했기 때문이다.

둘째, 아비멜렉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고향으로 달려간 아비멜렉은 외가의 도움을 구했는데 우리가 남이야? 라며 세겜 사람들의 힘을 얻고자 했다. 그래서 세겜 사람들이 돈을 모아 주었는데 그 돈은 4절 말씀에 따르면 바알브릿 신정에서 돈을 모아 주었다.

그리고 그 돈을 가지고 사람들을 모았다. 그런데 방탕하고 경박한 사람들을 돈으로 샀다. 한 마디로 불량배들을 모아 군사를 일으켰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아비멜렉은 목정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셋째, 신앙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왕이 되고자 하느느 사람이 중요한 문제를 앞두고 기도도 하지 않았으며성경에서 답을 구하지도 않았고 왕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을디 무엇인지 그리고 왕이 해야하는 일들이 무엇인지 성경에서 찾지도 않았다. 오히려 세력과 무력으로 스스로 왕이 되었을 뿐 아니라 기드온의 아들들을 바랑을 위한 제물로 삼았다.

5절 말씀에 따르면 아비멜렉과 일단들이 기드온의 아들70명을 한 바위 위에서 죽였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나? 70명이 한 집 안에 있어서 그 집을 불태워 죽였다면 이상하지 않지만 구지 바위 위에서 죽였다는 것은 바알을 위한 제단에서 불태웠다는 뜻ㅇ디ㅏ.

자! 그런데 세겜 사람들이 나서서 이런 사람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뽑았다. 그래서 살아 남은 기드온의 막내 아들 요담이 언약의 장소인 그리심산에 올라 이야기를 했다. 나무들이 자기들의 왕을 세운 이야기 이다. 이스아엘의 형태를 비유로 풍자하고 있다.

“여보시오 내 말을 들으시오. 나무들이 왕을 찾아 나섰다. 먼저 감람나무를 찾아 갔지만 ;내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는 데만 써야하니 나는 왕이 될 수 없다‘ 하며 거절했다. 그러자 무화과 나무와 포도나무에게 찾아갔지만 역시나 거절했다. 그래서 찾아간 것이 가시나무 였는데마 치 기다렸다는 듯이 ”내 그늘에 피하라 그렇지 않으면 가시나무에서 불이 나와 백향목을 사를 것이라“ 협박했다. 그러자 가시나무에게 기름을 부어 자신들의 왕으로 세웠다. 이게 무슨 말인지 아시오?”

무엇을 이야기하는 지는 너무 분명하다! 세겜 사람들이 자신들의 왕으로 아비멜렉을 세웠다는 이야기다. 감람나무, 무화과나무 그리고 포도나무 같은 과일을 주는 나무가 아니라 가시나무를 자신들의 왕으로 세웠다. 그런데 가시나무는 어떤 특징이 있는가? 가시나무는 자신의 그늘에 피하라 말했지만 가시나무에게는 피할 그늘이 없다. 그러니까 과실 나무처럼 과일도 없고 시원한 그늘도 없다. 오히려 찌는 가시만 있다. 그래서 가시나무 아래에 들어간다는 것은 스스로 죽으로 들어가는 꼴과 같다.

그런데 가시나무는 성경에서 종종 사람을 상징한다. 감람나무 무화과 나무 그리고 포도나무가 사람을 상징하듯이 가시나무는 종종 사람을 상징한다. 그런데 가시나무와 같은 사람이 언제 처음 나왔나? 아담이 죄를 지엇을 때에 등장했다. 아담이 죄를 짓자 세 가지 변화가 나타나는데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적대 관계로 바뀌었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깨어지고 땅은 저주를 받아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었다.

그런데 히브리서 말씀은 땅에서 뿐 아니라 우리 마음에서도 가시가 나올 수 있다 경고하고 있다. 교회에서도 가시나무와 같은 사람이 나올 수 있다. 히브리서 6장 7절과 8절 말씀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성경은 우리 신앙과 생활을 다루는 책이지 농사를 다루는 책이 아니다. 그런데 왜 1절에서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완전한 데로 나아가라” 라며 권면하던 교훈이 “채소 그리고 가시와 엉겅퀴” 이야기로 바뀌었을까? 우리가 쉽게 이해 할 수 있는 비유를 통해 깨달으라는 뜻이다.

마치 땅이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잘 흡수하여 채소를 내면 복을 받지만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받는 것처럼 우리도 선포되는 말씀을 잘 소화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으면 복을 받지만 육체의 열매를 맺으면 가시나무로 변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가인이 아벨을 찔러 죽이자 않았는가?

그런데 아벨을 찔러 죽이기 전에 어떤 일이 있었을까? 하나님의 말슴이 가인에게 주어졌다. 그러니까 자신의 제사가 열납되지 않은 것에 씩씩대던 가인에게 마치 하늘에거 비가 내리듯 말씀이 선포된다.

창세지 4장6~7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야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살인 사건이 있기 전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다. ”제사가 열남되지 않은 것 때문에 분노하느냐? 네가 선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열납받지 못했다. 네가 선을 행하였으면 어찌 제사를 열납하지 않았겠느냐? 가인아 깨닫지 못하느냐? 제사가 열납되는 것은 제물에 있지 않고 제사를 드리는 사람에게 있다. 내가 구하는 것은 상한 심령이기 때문이다.”

“가인아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삼킬 자를 찾고 있다. 그러니 너는 죄를 다스려야 한다” 말슴하셨다.
자! 그럼 가인은 어떻게 해야 했을까? 땅이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잘 흡수하여 채소를 낸느 것처럼 말씀을 잘 소화하여 빛의 열매를 내야 했다.

그런데 가인은 하늘에서 선포된 말씀을 묵상하여 성령의 열매를 내는 대신에 나의 제사는 열납받지 못하였고 아벨의 제사는 열납 받은 것을 끊임없이 묵상했다. 그래서 분노를 키우고 말았고 끝내 아벨을 죽이고 말았다.

살고 죽는 것이 “무엇을 묵상하는 가?”에 달려있다.
내가 살고 죽는 것이 그리고 교회가 살고 죽는 것이 “무엇을 묵상하는 가?”에 달려 있다. 그러니깐 “사건을 끊임없이 묵상하는가?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중단 없이 묵상하는가?”에 달려 있다.

그런데 가인은 무엇을 묵상했을까? 사건을 묵상했다. 내 제사는 열납되지 않았고 아벨의 제사는 열납된 것을 묵상했다. 그러다보니 거절받은 상처는 점점 커졌고 아벨에 대한 분노도 점점 커지고 말았다. 그래서 가인은 우는 사자에게 잡아 먹힌 것처럼 분노에 사로잡히고 말았고 결국 아벨을 찔러 죽이고 말았다. 그러니까 말씀을 마음에 품고 묵상하여 자신를 깨뜨리지 못하였기 때문에 타인을 죽이고 말았다.

그리고 또 다른 가시나무는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이었다. 그런데 사울도 가시나무가 되어 다윗을 찌르기 전에 하늘에서 비가 내리듯 말씀이 선포되었다.

사무엘상 15잘 22~23절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신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약하는 것을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그러면 사울은 무엇을 묵상했을까? 다윗이 골리앗을 죽였을 때에 여인들이 했던 말을 묵상했다. “사울이 죽인 사람은 수천 명이요. 다윗이 죽인 사람은 수만 명이라네” 그 말에 충격을 먹고 끊임없이 여인들의 말을 묵상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들어갈 리가 없었다. 그래서 말씀을 마음에 품고 묵상하여 자기를 깨뜨려야 했지만 자리를 깨뜨리지 못했고 결국 다윗을 찔러 죽이려고 했다.

이렇게 우리가 살고 죽는 것은 “무엇을 묵상하느냐”에 달려있다. 우리는 사건 대신에 말씀을 묵상하며 우리 자신을 깨뜨릴 수 있어야 한ㄷ. 그래서 사건을 묵상하면서 우리 자신을 고통에 빠뜨리지 않을 수 있고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다. 더 나아가 용서할 수 있고 관용할 수 있다.

자 그럼 말씀을 마음에 품고 묵상하여 자기를 깨뜨린 자에게 어떤 복이 있을까? 우선 말씀으로 자기를 깨뜨리는 것은 참 쉽지 않다. 마치 값비싼 향유 옥함을 깨뜨려 주님께 드리는 것처럼 말씀으로 자기르 깨뜨리는 것은 정말 쉽지 않다. 왜냐하면 죽는 것이 차라리 낫겠다 싶기 때문이다. 차라리 나를 죽여 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말씀으로 자기를 깨뜨린 자에게는 복이 있다ㅏ. 무덤에서 예수님께서 살아나신 것처럼 “성령으로 사는은혜”가 주어진다. “성령으로 사는 은혜”!!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의롭다함을 얻었다. 하나님과 평화를 이루어 구원 얻었다. 그런데 특별한 변화가 있었나? 비록 신분은 변했지만 행동은 크게 달라지지 않고 변화도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런데 말슴으로 나를 깨뜨리면 무덤에서 예수님께서 살아나신 것 처럼 “성령으로 사는 은혜가 주어진다” 그래서 감람나무나 포도나무처럼 열매 맺는 나무가 되어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고 또 그늘을 제공할 수 있다.

반면에 말씀으로 나를 깨뜨리지 못하면 자기를 사랑이라고 하는 가시가 평상시에는 웅크리고 있다가 결정적일 때에 튀어나와 옆에 있는 사람을 자꾸 찌르고 결국 자기 자신도 찌른다. 그러니까 관계를 깨뜨리고 교회를 무너뜨린다.

그러니 말슴 아래에 나를 두고 말씀으로 나를 부지런히 깨뜨려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성령으로 살아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또 다른 사람에게 과실을 먹여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런 사람을 직분자로 세워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야 우리 모두 살고 교회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남은 두 주 동안 더욱 근신하며 기도로 준비할 수 있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간절히 권면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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