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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_묵상] 사도행전 6장 1~7절_집사와 권사

건신담 2026. 5. 9. 22:58

1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2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4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5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6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흔들리지 않는 꽃이 없듯 문제없이 자라는 교회도 없다.
예루살렘 교회도 박해 속에 세워졌으며 문제 속에 자랐다.
외부적으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산헤드린공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박해했다.
내부적으로는 탐심에 가로잡힌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예루살렘교회를 오염시키려 했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는 핍박을 받을 수록 한 마음으로 기도 했다.
부패할 것 같을 때에는 권징을 통해 교회를 지켰다.
그런데 더 큰 시험이 찾아왔다.
헬라파 과부들이 구제에서 빠지기 시작했고 헬라파 사람들이 히브리파 사람들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복음으로 하나 되었던 교회가 구제 때문에 두동강 날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는 위기를 어떻게 처리했나?
첫째, 문제가 생겼다는 이유로 구제를 중단하지 않았다.
문제가 생기면 대처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문제를 회피하거나 하던 일을 중단하기도 한다.
“구제 때문에 문제가 생겼으니 까 구제를 중단하자!”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는 구제 때문에 문제가 생겼지만 구제를 중단하지 않았다.
사역하다가 문제를 만났지만 사역을 그만두지 않았다.
왜냐하면 구제는 복음의 본질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었고 구제를 중단하는 것은 올바른 대처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둘째,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기근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그래서 과부들이 큰 어려움을 격었고 교회는 과부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사도들이 자비의 사역까지 도맡아 처리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교인들이 자기 재산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들이 필요를 따라 구제를 해왔는데 교인들이 늘어나고 덩달아 필요한 곳이 많아지다 보니 놓치는 곳도 생기고 말았다.
그럼 누구의 책임일까?
말씀의 사역자들이 기도와 말씀에 전념하지 않고 자비의 사역까지 했기 때문에 책임을 져야 할까? 아니면 성도들이 나서서 하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았기 때문에 책임을 져야 할까?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는 누구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앞장에서 일어난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에 대해서는 엄중히 권징을 했다.
왜냐하면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에는 의도적으로 교회르리 속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아나니아와 갑비라는 다른 사람들이 땅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을 보고 자신들도 칭찬을 받고 싶었다.
그래서 땅을 팔았다. 하지만 막살 팔고보니 아까워서 얼마를 감추고서도 전부인 것처럼 사도들에게 거짓말을 했다.
그러나 들통나고 말았고 권징을 받았다.
그러나 헬라파 과부들이 매일 구제에서 빠진 사건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책임을 붇지 않았다.
왜냐하면 의도적으로 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도들은 본연의 사역 외에 자비의 사역까지 도맡아 하다 보니 너무 바빠 놓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도들은 사도들이 구제의 사역까지 하다 보니 그런 가 보다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여러가지 시험들을 만날 때에 이 두가지를 지혜롭게 구별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의도적으로 한 일인지 아니면 부주의해서 생긴 일인지 약해서 생긴 일인지 아니면 악해서 생긴 일인지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겪는 대부분의 일은 부주의해서 생긴 일이 아닐까?
그리고 약해서 생긴 일이 아닐까?
잘 몰라서 한 일이 아닐까?
그런데 마치 의도적으로 한 것처럼 성급하게 단정짓지 않는가?
약해서 한 것 처럼 섣부르게 판단하지 않는가?
그리고 불같이 심판하려고 하지는 않는가?
그렇다면 의도적으로 하나 것이나 악해서 생긴 일에 대해서 불쌍히 여기는 것이 잘못인 것처럼 잘 몰라서 한 것 또는 부주의해서 한 것에 대해 심판을 하려고 하는 것도 잘못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무슨 말인고 하니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한 것에 대해 불쌍히 여긴다면 잘못이지 않은가?
마땅히 합당한 권징을 해야한다.
반면에 헬라파 과부를 놓친 것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했다고 판단하여 책임을 묻는다면 잘못이라는 뜻이다.
편가르기를 하려고 했다고 생각하여 달려든다면 잘못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내가 아무리 섭섭해도 의도적으로 했다고 판단하여 책임을 묻는다면 또는 편가르기를 하려고 했다고 생각하여 달려든다면 잘못이라는 뜻이다.
중요한 것은 내 감정이 아니라 사건의 진실이다.
그런데 우리가 얼마나 이런 실수를 자주하는가?
의도적으로 저지른 악한 일에 대해서는 은혜를 이야기하고 부주의해서 하거나 잘 몰라서 한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물어야 한다. 하지 않는가?
자녀들을 키울 때에도 이러한 지혜가 필요하다.
자녀가 실수를 했는데 회초리를 든다면 어떻게 될까?
눈치 보는 자녀로 자라지 않을까?
반대로 잘못을 했는데 눈감아 준다면 어떻게 될까?
자녀를 망치는 길이다.
그래서 이 두가지를 잘 구별하여 대응해야 한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는 문제가 생겼다고 해서 구제를 중단하지 않았고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
대신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여 사역을 나누기로 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부르셨기 때문이고 모든 사람들에게 각각의 직무를 맡기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들에게서 자비의 사역을 떼어 말씀의 사역에 전념하도록 했고 자비의 사역은 집사들을 세워 맞기기로 했다.
여기서 질문 하나 하겠다.
말씀의 사역은 교회의 본질에 속하는 것일까?
그렇다!
말씀의 사역은 교회릐 본질에 속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교회에게 말씀의 사역자들을 선물로 주셨기 때문이다.
에베소서 4:11~12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부활 승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좌정하신 예수님께서 사도와 선지자를 주셨다. 곧, 교회의 창설 직원으로 사도와 선지자에게 말씀의 사역을 맡기셨다. 그리고 복음 전하는 자 곧, 마가나 누가처럼 사도들과 함께 복음을 전하는 자 또는 순회 설교자를 세우셨다. 그리고 목사를 주셨다.
그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듯이 말씀으로 교회를 세우라 하셨다.
따라서 말씀의 사역은 교회릐 본질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면 자비의 사역은 교회의 본질에 속하는 것일까? 아니면 보조적인 것일까?
7절 말씀 때문에 자비의 사역은 말씀의 사역에 보조적인 것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제자의 수가 점점 많아졌고 교회가 성장했다.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씀의 사역은 교회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고 자비의 사역은 보조적인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말씀의 사역이 교회의 본직에 속하는 듯이 자비의 사역도 교회의 본질에 속하느 것이다.
왜냐하면 1정 말씀의 ”매일의 구제“라는 단어와 4절 말씀의 ”말씀 사역ㄱ“이라는 단어는 같기 때문이다.
비록 ”구제“라는 말과 ”사역“이라는 말로 다르게 번역했지만 헬라어로는 구제나 사역 모두 섬김을 뜻하는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1절 말씀의 매일의 구제는 ”매일의 섬김“과 4절 말씀의 말씀의 사역은 ”말씀의 섬김“이라 번역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구제 사역이나 말씀 사역이나 하는 일은 다르지만 모두 교회릐 본질이며 중요한 사역이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구제의 사역이나 말씀의 사역은 모두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곧 구제의 사역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기쁨을 잃어버린 자들을 섬기는 사역이고 말씀의 사역은 그리스도의 구속 자유를 모르는 자들을 섬기는 사역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들이. 성령과 지혜와 믿음이 충만해야 했던 것처럼 집사도 성령과 지혜와 믿음이 충만해야 했다.
그러니까 사도가 말씀의 식탁에서 봉사하는 사람으로서 성령과 지혜와 믿음이 충만해야 하는 것처럼 집사도 구제의 식탁에서 봉사하는 사람으로서 성령과 지혜와 믿음이 충만해야 했다.
곧 말씀으 ㅣ식타에서 성경을 다룬다고 더 많은 성령과 지혜와 믿음이 필요한 것도 아니라 구제의 식탁에서 물질을 다룬다고 해서 더 적은 성령과 지혜와 믿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모두 그리스도의 복음을 다루는 그리스도의 일꾼이기 때문에 목사나 집사 모두 성령과 지혜와 믿음이 충만해야 한다.
그리고 더불어서 집사는 장로 후보생이 아니다.
그러니까 전도사가 목사 후보생이듯 집사는 장로 후보생이 아니다.
왜냐하면 전도사는 목사가 되기 위해 수련을 받는 직원 이지만 집사는 장로가 되기 위해 수련을 받는 직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집사의 사역을 신실히 감당하였을 때에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의 예수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지만 집사는 궁극적으로 장로가 되기 위해 거치는 과정이 아니라는 뜻이다.
왜나하면 목사는 말씀의 직분으로서 말씀하시는 성부 하나님의 사역을 드러내야 하고 장로는 치리의 직분으로서 다스리는 성자 예수님의 사역을 드러내야 하고 집사는 자비의 직분으로 위로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사역을 드러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부 하나님의 사역과 성자 예수님의 사역과 성령 하나님의 사역이 구별되듯이 목사와 장로와 집사는 구별되어야 한다.
그리고 각각의 고유한 직무를 통해 삼위 하나님의 영광과 사역을 드러내야 한다.
다시 돌아와서 예수살렘 교회는 구제의 사역을 담당할 직분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교회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일곱 사람을 택했다.
곧 투표하여 뽑았다. 그리고 안수하여 구제의 사역을 맡겼다.
그런데 왜 제비뽑기를 하지 않고 투표하여 세웠을까?
앞서 가롯 유다 대신에 새로운 사도를 세울 때에는 추첨을 통해 맛디아를 세웠다.
그런데 집사는 왜 추첨 대신에 투표를 했을까
그리고 그 이후에 장로를 세울 때에도 왜 추천 대신에 투표를 했을까?
시간이 흐르면서 민주주의 원칙이 정착했기 때문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오순절 전후로 바뀌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곧 성령님께서 교회로 오시기 전에는 구약의 방식을 따라 제비뽑기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확인했다.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시는 여호와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로는 제비뽑기를 하지 않고 교회가 성령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인도를 따라 일꾼을 살펴보고 선택했다. 그렇다면 교회 선거는 민주주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다 함께 확인하는 수단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결과에 대해서도 다 함께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다 함께 하나님의 뜻을 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추천 대신에 투표를 하기 때문에 교회의 책임은 더 커졌다.
왜냐하면 우리의 선택이 끼어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인도를 따라 일꾼을 뽑지 않고 우리의 욕심을 따라 일꾼을 뽑을 때에는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서는 다음 에 알아보겠다.
잠시 정리를 하면 성령님께서 교회에 오신 이유 더 이상 추첨을 하지 않고 투표하여. 일꾼을 세운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는 안수하여 구제의 사역을 맡겼다.
그러자 하나님의 말씀은 더욱 힘을 얻었고 제자의 수는 많아졌다.
그런데 우리의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다.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했다”
복음의 아름다움을 보고 제사장들도 복음에 굴복했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복음이 무엇인지 교회 안에서 날마다 선표되고 있었고 복음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교회 안에서 실제 증명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사장들은. 예수님을 줄곧 반대하였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았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메시야라고 한다면 성전을 모독할 리가 없었고 율법을 무시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저주 받은 자라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았다.
그리고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을 부정했으며 사도들 마저 매질했다.
그런데 교회에서 무엇을 하는가 보았더니 사도들은 성전에서나 집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고 성도들과 함께 기도했다.
그리고 집에서는 성찬을 하며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으르 기념했다.
그리고 어떤 성도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팔아 어려운 성도들을 돌보았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의 자유를 얻었지만 가난 때문에 구원의 기쁨을 잃어가는 사람들을 돌보았다.
곧 주님의 식탁에서 소외되는 사람들이 없는지를 부지런히 살폈다.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다보니 헬라파 과부들이 식탁에서 소외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가 아예 그 일을 맡을 사람을 세워 약한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히브리파 그리고 헬라파를 넘어서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제사장들은 교회 안에서 복음이 말해질 뿐 아니라 복음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의 도에 하나둘 복종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교회에서 복음의 아름다움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렇게도 비유할 수 있을 것 같다.
목사는 날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교하고 가르쳐서 집의 기초를 놓고
장로는 부지런히 심방하고 지혜롭게 치리하여 집의 뼈대를 세우고
그러나그것만으로는 집이 지어지지 않는다.
살림 살이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집사와 권사가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의 자유를 얻었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구원의 기쁨을 잃어가는 성도들이 있기 때문이다.
물질적인 이유일 수도 있고 신체적인 질병일 수도 있고 심리적이며 영적인 이유일 수도 있다. 그러한 것을 섬세하게 살피고 돌볼 사람이 집사와 권사이다.
단지 재정과 식당의 봉사로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재정과 식당의 봉사로 상징되는 주님의 시탁에서 재물과 건강과 마음의 어려움 때문에 기쁨을 잃어가는 성도들을 돌보는 일을 할 일꾼이 필요하다.
남은 기간동안 성령님의 지혜와 인도를 바라며 함께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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